책소개
라가르스가 세 번 고쳐 쓴 희곡이다. 작품에서 불치병으로 등장하는 루이는 에이즈로 사망한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의 연극적 고뇌와 성찰이 반영된 독특한 형식, 시적인 문체가 어우러져 문학성과 연극성이 고루 고취된 작품이다.
어머니와 딸 수잔느가 함께 살고 있는 집에 어느 일요일,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던 이 집 장남 루이가 불쑥 연락하고는 택시를 타고 도착한다. 기다리고 있던 작은 아들 내외(앙투완느, 카트린느)까지 해서 모처럼 오랜만에 한 가족이 만나는 어색한 자리이다. 주인공인 루이는 불치병으로 죽음을 선고받고 식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것이지만 그의 무소식에 대해 식구들이 쏟아붓는 원망, 비난, 분노, 죄의식 등 말의 홍수 앞에서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못하고 집을 떠난다. 탕자 아들의 귀환, 카인과 아벨, 율리시스 같은 성경이나 신화에서 차용한 테마를 찾아볼 수 있으며 가족, 소통 부재, 고독, 사랑과 죽음, 부재, 실종, 여행, 허위의식 등의 주제도 엿보인다.
대사가 유연하게 흐르지 못하고, 망설임·반복·본론에서 벗어난 이야기·마침표와 쉼표의 나열·시적인 문체·파편화·콜라주 등의 요소로 말하기의 어려움을 표현했다. 시간 흐름이 논리적이지 않고 무질서한 기억에 따라 시간이 회귀하는 부분도 형식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200자평
라가르스가 세 번 고쳐 쓴 희곡이다. 모녀가 살고 있는 집에 10년 전에 집을 떠났던 장남 루이가 불치병을 선고받고 식구들에게 알리기 위해 돌아온다. 독특한 형식, 시적인 문체가 어우러져 문학성과 연극성이 고루 고취된 작품이다. 망설임, 반복, 본론에서 벗어난 이야기, 마침표와 쉼표의 나열, 시적인 문체, 파편화, 콜라주 등의 요소로 말하기의 어려움을 표현했다. 시간 흐름이 논리적이지 않고 무질서한 기억에 따라 시간이 회귀하는 부분도 형식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지은이
장뤼크 라가르스(Jean-Luc Lagarce)는 작가이자 연출가로 1957년 2월 14일 프랑스 오트손 지방 에리쿠르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푸조 공장 노동자로 있던 발랑티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1975년 대학에서 철학 공부를 하기 위해 브장송으로 간 그는 브장송 국립연극원에도 등록한다. 1977년 연극원 동기들과 아마추어 극단, “마차극장”을 만들어 직접 연출을 맡아 베케트, 골도니, 자신의 작품을 공연하기 시작한다. 1979년 희곡 <카르타고>가 ‘프랑스 퀼튀르(프랑스 문화)’ 라디오 방송에 낭독 형식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이후 희곡 여러 편이 방송에서 낭독된다. 1980년 브장송대학에서 <서양에서의 연극과 권력>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는다. 박사 과정을 중단하고 1981년부터 프로 극단이 된 “마차극장”에서 본격적인 연극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라신, 몰리에르, 마리보, 페이도, 라비슈, 이오네스코 같은 대가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비연극 작품을 각색한 작품이라든가 자신의 희곡을 포함해 20편의 작품을 연출한다. 1982년, 희곡 <마담 크니페르의 동프러시아 여행>이 장클로드 팔 연출로 당시 코미디 프랑세즈 주관이던 오데옹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이렇게 해서 라가르스의 작품이 외부 연출가에 의해 공연되기 시작하고, “열린 연극”에서 출간된다. 그사이 다른 연출가에 의해 라가르스의 작품 네 편이 공연된다. 1990년 이후부터는 그의 작품이 계속 공연, 출판되면서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진다. 1988년에 에이즈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는 이전부터 질병, 죽음, 실종에 대한 테마를 작품에서 다루고 있었다. 특히 1982년에 쓴 <페스트가 있던 해의 막연한 기억들>에서 이러한 암시를 했다. 1983년과 1988년에 국립문예진흥원에서 지원금을 받은 바 있으며, 1990년에는 빌라 메디치에서 제정한 ‘레오나르다빈치상’을 수상하면서 창작 지원금을 받아 6개월간 베를린에 체류한다. 거기서 <단지 세상의 끝>을 쓴다. 이후 자신의 희곡이 작품 심사를 거부당하자 2년간 집필을 중단하고 연출과 각색에 몰두한다. <단지 세상의 끝>을 개작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먼 나라>를 완성한다. 1995년 9월 30일, 베데킨트의 <루루>라는 작품을 연습하다 37세 나이로 사망했다.
옮긴이
임혜경은 숙명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프랑스 몽펠리에 제3대학, 폴 발레리 문과대학에서 로트레아몽 작품 연구로 불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숙명여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 및 문과대 학장으로 재직 중이다. 2009년에 창단한 ‘극단 프랑코포니’ 대표이며, 프랑스문화예술학회 회장, 공연과 이론을 위한 모임(공이모) 대표, <공연과 이론> 편집주간, 희곡낭독공연회 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공이모와 연극평론가협회 회원으로 연극평론 활동도 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부터 공역자인 카티 라팽(한국외대 불어과 교수)과 함께 우리나라 문학을 프랑스어권에 소개하는 번역 작업을 시작해 대한민국문학상 번역신인상, 한국문학번역상을 카티 라팽과 공동 수상한 바 있다. 윤흥길의 장편소설 ≪에미≫를 프랑스 필리프 피키에 출판사에서, 윤흥길의 중단편 선집인 ≪장마≫를 프랑스 오트르 탕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카티 라팽과 공동으로 한국 희곡을 불역해 최인훈의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윤대성의 <신화 1900>, 이현화의 <불가불가>를 파리, 밀리외 뒤 주르 출판사에서 1990년대 초반에 출간했다. ≪한국 현대 희곡선집≫(박조열의 <오장군의 발톱>, 오태석의 <자전거>, 이강백의 <봄날>, <호모 세파라투스>, 김의경의 <길 떠나는 가족>, 이만희의 <그것은 목탁 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 김광림의 <사랑을 찾아서> 수록)은 1990년대 후반에 파리 라르마탕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이윤택의 ≪문제적 인간-연산≫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32개국 ‘희곡 강독회’ 참가작이며, 프랑스 브장송, 레 솔리테르 젱탕페스티프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이윤택 희곡집≫(<오구>, <불의 가면>, <바보 각시> 수록)은 파리, 크리크 라신 출판사에서, ≪한국 현대 희곡선≫(차범석 <산불>, 최인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이근삼 <30일간의 야유회> 수록)은 파리 이마고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한국연극의 어제와 오늘≫(편역)이라는 한국 연극 전문 연구서를 파리 라망디에 출판사에서 2007년에 출간한 바 있다. 2010년에는 이현화의 희곡집 ≪누구세요?≫(<누구세요?>, <카덴자>, <산씻김>, <0.917>, <불가불가> 수록)가 파리의 이마고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그 외에도 국립극장의 튀니지 공연 대본인 김명곤의 희곡 <우루 왕>을 불역한 바 있으며, 유민영의 연극 논문 <해방 50년 한국 희곡>을 불역해 서울, 유네스코 잡지 ≪르뷔 드 코레(Revue de Corée)≫에 게재한 바 있다. 2004년 이후부터는 희곡 낭독 공연에 참가한 동시대 불어권 희곡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장뤼크 라가르스의 ≪난 집에 있었지 그리고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상대방의 자리≫(연극과 인간, 2007), 캐나다 퀘벡 작가 미셸 마르크 부샤르의 ≪고아 뮤즈들≫(지식을만드는지식, 2009)과 ≪유리알 눈≫(지식을만드는지식, 2011), 프랑스 극작가 장 미셸 리브의 ≪동물 없는 연극≫(지식을만드는지식, 2011)을 출간했고, 스웨덴 작가인 라르스 노렌의 <악마들>, 아프리카 콩고 작가 소니 라부 탄지의 <파리 떼 거리> 등을 번역했다. 그 외에 카티 라팽의 시집 ≪그건 바람이 아니지≫(봅데강)를 번역한 바 있으며, 다수의 논문 및 공연 리뷰를 썼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프롤로그
제1부
막간극
제2부
에필로그
해설
지은이에 대해
희곡 작품 목록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33-134쪽,
내가 부재했던 여러 해 동안, 어느 여름날,
프랑스 남쪽에서다.
밤에, 산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에,
철도를 따라 걷기로 결심한다.
난 그 길이 구불구불한 도로를 피하는,
지름길이고, 집 근처를 지나간다는 걸 안다.
밤이면, 어떤 기차도 다니지 않으니까, 위험하지 않을 거고
그렇게 해서 난 길을 찾게 되겠지.
어느 순간, 거대한 철교 입구에 도달한다,
달빛 아래 철교는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고,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밤,
홀로 걷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건
(바로 이게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거다)
크고 멋진 소리,
계곡에 울려 퍼지도록 환희에 찬 긴 함성을 질러야겠다고,
나한테 선사해도 될 그런 행복,
힘껏 한 번 소리쳐 보는 것,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갈 위에서 내 발소리와 함께 난 다시 길을 떠난다.